부안 농부 유재흠씨(46)를 만나러 가기 전, 한국고용정보원 홈페이지를 들어가 봤다. 문득 농부의 직업 만족도가 궁금해져서다.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다. 전체 직업 759개 중 농부의 직업 만족도는 635위였다(한국고용정보원은 2010~2011년 국내 759개 직업 종사자 2만6181명을 대상으로 직업 만족도를 조사한 바 있다). 일용직·노무직과 나란히 거의 최하위급이다.
그런데 올해 초
협동조합을 홍보하는 행사에서 우연히 만난 유재흠씨는 너무도 스스럼없이 이런 말을 했다. "지금 고2인 아들에게 농사를 물려주려고요. 아들도 그러기로 했어요. 지금 변산공동체학교에 다니며 열심히 농사를 배우고 있어요." 아니, 인기가 바닥인 직업을 혼자 하는 것도 모자라 아들한테 대물림하겠다고? 유재흠씨를 만나러 가야겠다고 마음먹은 것은 이 때문이었다. 무엇보다 그의 아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궁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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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IN 이명익 전북 부안군 하서면 석상리에서 2대 농업을 준비 중인 유재흠(오른쪽)·유수현 부자가 모내기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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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가 찾아간 6월 초, 전라북도 부안 들녘은 한창 분주했다. 수확을 앞둔 밀과 보리가 노랗게 익어가는 한편에서 모내기가 한창이었다. 이앙기와 콤바인이 움직이며 내는 기계 소리가 요란했다. 시골길을 잠시 찾아 헤맨 끝에 유씨 부자를 만난 것은 하서면 청호리 수매창고에서였다. 유씨의 아들 수현군(16)은 평일인데도 집에 있었다. 학교에서 모내기 방학을 준 덕분이라고 했다.
아버지와 아들의 첫인상은 달라도 많이 달랐다. 새까맣게 그을린 피부에 막걸리깨나 들이켤 것 같은 유재흠씨가 천생 농부의 풍모라면 아들 수현군은 뭐랄까, 일본 아이돌 뮤지션을 연상케 했다. 호리호리한 몸매, 적당히 웨이브가 들어간 헤어스타일과 웃을 때 살짝 엿보이는 치아 교정기가 그런 인상을 더했다. 혹시나 싶어 물어보니 학교에서 친구들과 함께 밴드를 한다고 했다.
'이런 도회풍 청년이 농사라고?' 직접 실물을 보니 고개가 더 갸웃거려졌다. 의심은 이튿날 아침이 되어서야 풀렸다. 아버지 도움 없이 수현군 혼자 모내기하는 광경을 목격하고서다. 이앙기에 모종을 싣고 논에 나가 한줄 한줄 침착하게 모를 심어나가는 그의 모습을 보니 유재흠씨가 왜 아들을 일러 "요즘은 장정 한 사람 몫을 한다"라고 칭찬했는지 알 것 같았다. 잠시 짬이 난 틈을 타서 '언제 그렇게 농사일을 배웠느냐'고 물었다. 수현군은 "아직 멀었죠. 이제야 일머리를 아는 정돈데요 뭘"이라고 짧게 대꾸했다. 아직은 농사일 그 자체보다 이앙기 모는 일이 더 재미있는 10대라지만 초보 농부로서의 책임감이 배어났다.
그렇다면 이들 부자는 부안에서 대대손손 농사를 지어온 것일까? 그래서 가업을 이어가려는 것일까? 그것도 아니었다. 유재흠씨는 이를테면 귀농민이다. 1991년 농민단체 간사를 맡게 되면서 부안에 흘러든 아내 임덕규씨(46)를 따라 어영부영 낯선 타지인 이곳에 눌러 살게 됐다. 동갑내기인 두 사람은 나란히
서울대 운동권 출신이다. 1980년대 중·후반에는 학생운동에 연루돼 옥고를 치른 일도 있다. 부안을 선택할 때 유씨는 아내와 단단히 약속한 바가 있었다고 한다. "운동을 그만두더라도 농사는 계속 짓는다." 강원도 춘천에서 자란 어린 시절부터 유씨는 손에 흙 묻히는 일이 좋았다. 일 잘한다는 소리도 곧잘 들었다. 대학 때 농촌활동을 가서 동네 주민들과 낫으로 풀베기 시합을 벌이면 승리는 늘 그의 몫이었다.
운동권 출신, 아내 따라 부안으로부안으로 귀농한 지 20여 년. 그는 약속을 지켰노라 자부한다.
전국농민회총연맹(전농) 전북도연맹 정책실장 등을 맡으며 바쁘게 운동하는 동안에도 농사일에 소홀한 적이 없다. 귀농한 지 10년 된 2000년대 초반에는 뜻이 맞는 농민들과 작목반도 만들었다. 우렁이를 이용한 친환경 농법으로 농사를 지어본 것인데, 결과는 만족할 만했다. 갈수록 함께하겠다는 농가가 따라붙으면서 작목반원이 한때는 100여 명까지 늘었다. 농사짓는 면적도 340ha까지 확대됐다. 그러던 2008년, 대형 사고가 터졌다. 작목반이 납품해 시중에 유통된 친환경 쌀에서 잔류 농약이 검출된 것이다.
그가 살면서 맞닥뜨린 최악의 시련이었다. 잔류 농약이 검출되면 함께 납품한 곡식은 모두 폐기해야 한다. 남은 곡식도 정밀 검사가 끝날 때까지 출하가 무기한 연기된다. 물질적 손해도 손해지만 정작 그를 괴롭힌 것은 인간적 배신감이었다. 믿었던 사람들이 몰래 농약을 쳤다는 사실이 더 충격이었다. 사고가 터지자 사람들은 낯빛을 바꿨다. '당신이 먼저 작목반을 하자고 했으니 책임도 당신이 지라'는 식이었다. 그 무렵, 유씨는 뒷산 소나무만 쳐다보고 다녔다. 시도 때도 없이 찾아드는 자살 충동 때문이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깨달았다. '모든 문제가 나로부터 비롯됐구나' 하는 것을. 돌이켜보면 사람들이 원망스러운 것은 뭔가 기대하는 게 있어서였다. '내가 당신들을 위해 어떤 희생을 했는데….' 이런 생각이 알게 모르게 자신을 병들게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날 이후 그는 마음을 바꿨다. 나 자신을 위해 열심히 사는 것이 가장 잘사는 길임을, 나도 살리고 남도 살리는 길임을 깨달았다는 것이다.
모든 것을 다시 처음부터 시작하겠다고 마음먹은 그는 일단 작목반부터 정리했다. 유사 사고가 한 번만 발생해도 해당 농가의 친환경 인증을 박탈하고 나머지 농가의 손실을 전량 보상키로 하는 등 책임 요건을 대폭 강화하자 작목반 다수가 떨어져 나갔다. 정부 보조금을 노리고 친환경 농사에 달려들었던 농민들은 이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정리됐다. 남은 이는 100명 중 23명뿐이었다. 경작 면적 또한 340ha에서 50ha로 7분의 6 가까이 축소됐다. 어찌 보면 초라하기 그지없는 처지가 된 이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민 것이 협동조합이었다. 그전부터 유씨가 속한 작목반과 부분 거래를 하고 있던 아이쿱생협은 사정을 알고 난 뒤 이들이 출하한 쌀과 밀을 전량 수매하기로 결정했다. 온갖 시련을 겪었음에도 친환경이 아니면 길이 없겠다고 남은 농민들의 절박함이 도시 소비자의 마음을 움직인 것이다.
그 뒤 유씨는 서서히 안정을 되찾았다. 작목반 경작 면적도 100ha까지 다시 늘었다. 생협(소비자생활협동조합) 특유의 계약 재배 시스템 덕분이다(위 상자 기사 참조). 한살림이나 아이쿱 같은 생협은 농사를 시작하기 전 생산자(농민)와 소비자·생협 직원이 함께 모여 내년에는 얼마만큼의 농사를 어떻게 지을 것인지, 가격은 어떻게 할 것인지를 미리 약속한다. 덕분에 생협 생산자와 소비자는 안정된 가격에 농작물을 거래할 수 있다. 여기서 드는 의문 하나. 그래도 쌀이나 밀 가격이 몇 배씩 치솟을 때면 농민 처지에서는 생협 아닌 다른 데 비싼 값에 내다팔고 싶은 유혹을 느끼지 않을까? 그럴 일은 없다고 유재흠씨는 잘라 말한다. 눈앞의 이익에 홀려 안정된 미래를 파는 바보짓을 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유씨가 아들에게 농사를 물려줘도 되겠다는 확신이 생긴 것도 생협과 거래를 하면서다. 주변을 돌아보면 사실 한심했다. "어느새 아이들 살기가 참 힘든 세상이 됐더라"고 유씨는 말한다. 농가 대부분이 빚을 져가며 자식들을 가르치건만, 대학을 졸업하고도 노는 아이들이 태반이었다. 중학교 진학을 앞두고 유씨는 아들을 유심히 관찰했다. 보아하니 공부에 취미는 없는 듯했다. 경쟁이 잘 맞는 체질 같지도 않았다. 그렇다면 굳이 대학 진학을 고집할 필요가 없었다. 자신의 경우 살면서 서울대 나온 덕을 본 것이 사실이지만 앞으로는 학벌이 그만한 프리미엄을 발휘할 것 같지도 않았다. 1년여를 관찰한 끝에 유씨는 아들과 대화를 시도했다. "세상을 사는 데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머리로 벌어먹고 사는 것, 또 하나는 손발로 벌어먹고 사는 것. 머리로 먹고살려면 돈은 많이 벌되 머릿속이 복잡할 것이요, 손발로 먹고살려면 돈은 많이 못 벌지만 개운할 거다. 너는 어떻게 살고 싶냐?" 보름가량을 고민한 뒤 아들이 답했다. "손발을 쓰면서 사는 게 나을 것 같아요." 그날 이후 학생 전원이 공동체 생활을 하면서 농사를 짓는 변산공동체학교가 수현군의 새 학교가 되었다.
"고소득은 아니지만 안정적 소득"변산공동체학교에 5년째 다니는 수현군은 얼마 전 검정고시로 중학교 학력을 취득했다. 그러나 '친구들이 다들 시험 준비를 하기에 따라했을 뿐' 고등학교 검정고시까지는 굳이 치를 생각이 없단다. "나는 농사를 지으면서 내가 좋아하는 음악이나 풍물을 하며 살고 싶어요. 이렇게 사는 데 굳이 졸업장이 필요할 것 같진 않아요"라고 그는 말했다. 그래도 아직 어린 나이인데 좀 더 폼나는 일이 하고 싶지는 않을까? 기자의 우문에 아이의 대답이 똑 떨어진다. "전 도시에 살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어요. 농사는 힘들지만 배울수록 재미있어요." 그의 걱정이라면 중졸 농부한테 시집올 한국 처녀가 과연 있을까 하는 정도? 먹고사는 데 대한 두려움은 없는 듯했다. 농부인 아버지가 연봉 5000만~6000만원을 거뜬히 버는 것을 곁에서 지켜봤기 때문이다.
"생협이 고소득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안정적인 소득을 보장한다"라는 유재흠씨는 예측 가능한 농사를 할 수 있게 하는 것이야말로 생협의 핵심이라고 말했다. 도시와 농촌, 생산자와 소비자가 서로를 믿고 지켜주는 협동경제 시스템에서 2대 농부의 꿈 또한 싹트고 있었다.
김은남 기자 / ken@sisain.co.kr